우리나라가 이제 양 중심의 성장에서 질 중심의 성장으로 국가발전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거나, 이를 위해 건강하고 풍부한 국가지식 생태계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연구윤리가 그 생태계의 game rule이 되어야 한다는 담론은 생략하고, 곧바로 연구윤리 이야기로 들어가자.
그동안 빨리빨리 대충대충 성과를 얻어왔던 우리에게는 윤리가 거추장스럽고 귀찮은 절차로 보이지만, fast follower에서 first mover로 전환되는 과정에, 미지의 지식세계를 탐험하는 과학자들에게 연구윤리는 필수적이다. 연구윤리는 과학자를 보호하고 연구결과에 대해 신뢰를 높이는 체계화된 행동양식이라는 측면을 알아야 한다. 그동안 우리 과학기술정책에서는 큰 원칙이 자주 변경되었으므로 제도의 미세한 부분에는 관심을 두지 못했다. 그런데 연구윤리는 이런 미세한 부분에 존재하며, 연구활동의 전반(연구제안서 작성, 연구수행, 데이터 정리, 연구결과 보고, 논문 발표, 기술 이전, 창업, 이해의 충돌 관리, 피험자 보호, 실험동물 복지, 멘토링 등)에 걸쳐 녹아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연구윤리정책은 연구부정과 연구비 사용에 초점을 두고 있으니 아직 초보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우리 과학기술정책이 투자(input)와 성과(output)의 관점에서 벗어나 과정(process)으로 눈을 돌린다면 연구윤리의 부족한 모습이 보일 것이다. 즉,
우리의 지식이 잘 생산되고 있는가? 연구개발 효율은 어찌하면 높아지나?
우리의 지식이 잘 축적되고 있는가? 기술축적은 잘 되고 있는가? 선진국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우리의 지식이 잘 확산되고 있는가? 산학연 간의 지식흐름이 원활한가?
우리의 연구인력으로 우수인재들이 모여드는가? 그들의 애로점은 무엇인가?
우리가 직접 양성한 인재가 세계무대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로 성장하는가?
연구윤리는 이제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로 발전해 가고 있으므로, 우리가 따라갈 수 밖에 없다는 측면도 이해해야 한다. 문화적 산물인 윤리를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추려면 문화적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가장 어려워 보이는 것이 “이해 충돌(conflicts of interest, COI)의 관리”이다. 여기에는 유교적 관계중심주의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COI를 더 깊게 살펴보자.
COI란 개인의 직무와 그의 사적 이익 사이에 관련성 이 생길 때, 그의 직무적 평가· 심사· 판정이 그의 사적 이익을 위해 결정되지 않았는지 제3자가 합리적 의문을 제기 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해관계'의 발생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며, 연구·교육활동 또는 공적활동에서 흔히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충돌상황'이 발생하면, 평가· 판정에 편견이 작용할 수 있고 연구활동에 왜곡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교육의 엄격성, 연구의 무결성 또는 기관의 사회적 신뢰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1. 이해의 충돌은 금전적 이해의 충돌(financial conflict), 직무의 충돌(conflicts of commitment), 인적 충돌(personal conflict), 지적 충돌(intellectual conflict)로 구분하지만, 연구현장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연구활동에서 COI가 가장 발생하기 쉬운 경우는 임상시험과 연구자의 창업(start-up)이라고 볼 수 있다.
임상시험은 약품이나 의료기기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확인하기 위해 인간을 대상으로 시험하는 과정이며 그 시험 결과가 시판 승인으로 직결되므로, 만약 제조업체와 연구자 사이에 이해관계가 있다면, 임상시험 결과의 정확한 판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임상시험은 착수하기 전에 기관윤리위원회(institutional review board, IRB) 심사를 위해 제출하는 연구계획서(protocol)에 제안된 연구에 사용할 모든 의약품 ·의료기기· 생물제제의 특징과 출처를 표시할 것과 학교·학과·개인 계정을 포함하여 연구를 지원하는 데 동원된 모든 재정의 출처를 밝힐 것을 연구과제 책임자에게 요구하며, 이것을 심사하는 절차를 가진다. 선진국은 이런 심사를 전담하는 행정부서로 ‘COI 관리실(COI office)’을 설치·운영한다. COI 관리실은 IRB에서 심사하는 피험자 모집방법, 동의서 양식 및 개인정보보호와는 달리,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심사한다. 그리고 이해관계가 밝혀지면 COI 관리실에서 ‘COI 관리 계획(COI management plan)’을 작성하고 COI 위원회(COI committee)에 상정하여 확정하며, 그 관리계획을 이행함으로써 COI를 미리 방지하는 것이다.
연구자의 창업에서도 유사한 절차를 적용한다. 연구자의 창업에 관해 미국의대학에서 적용하는 ‘모범 행동양식(Good Scientific Practice)’을 보자.
연구자가 연구기관에서 수행하는 연구 활동과 개인적 창업 활동은 재원, 인력, 자원 및 지적재산권이 명백하게 구분되도록(혼용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함
연구자의 창업 활동에 대한 시간과 노력이 연구기관의 직무수행에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함(미국은 1주 1일로 허용된 외부활동 시간을 창업에 활용함)
연구자는 외부에서 경영의 책임이 따르는 직함과 역할은 맡을 수 없으며,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도 자문 역할만 제공해야 함(전문경영인 영입)
연구자가 기업의 대표자 자격으로 자신의 연구기관과 기술 이전 협상을 할 수 없음(연구자 자신이 개발한 기술이 자신의 기업으로 이전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연구기관의 기술 이전 전담실(technology licensing office)의 객관적 마케팅 분석결과가 있어야 가능함)
이러한 규범들은 우리에게 매우 낯설다. 일의 순서를 보면, COI를 관리하기에 앞서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 판단하는 모범 행동양식이 규정되어야 충돌상황을 관리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윤리규범을 정하지 않고 연구자의 창업을 무작정 권장했으므로 이미 COI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려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우리 대학가에는 매우 어색한 모습이 등장한다.
오전에는 교수로서 비영리 활동을 하고 오후에는 창업 기업의 사장으로서 영리 활동을 하는 사람이 생겨남(나중에 두 역할 중 하나가 실패할 가능성이 큼)
대학의 연구 공간이 곧 창업 공간으로 겸용되기 쉽고, 대학의 재원, 인력, 자원, 지적재산권이 창업기업과 혼용되어 감사에 저촉되는 경우가 많이 생김
우리나라는 2019년 한 해에 102개 대학에서 281개의 교원 창업 기업이 설립되었다고 한다2.
그리고 교원 창업은 더욱 강조되고 있으며, 임상시험도 확대되는 추세일 것이 분명하다. 선진국과 비교할 때, 제도적 체계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연구비가 확대되고, 연구과제가 많아지며, 창업이 강조되는 등의 방향으로 평가를 강화해 간다면, 연구자가 선의의 피해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즉, 정부의 방침대로 충실하게 연구하고 남들처럼 창업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COI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이다.
연구윤리란 제도적 장치를 갖추어야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제도적 장치 없이 규범만 정하고 연구자가 알아서 준수하라고 한다면 많은 연구자들이 힘들어진다.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연구계에 COI를 관리하는 체계룰 제대로 구축하여야 한다. 연구기관은 COI 관리실과 COI 위원회를 설치하여야 하며, 모든 연구자는 매년 이해관계(재정관계, 외부활동)를 신고· 공개해야 한다. 그리고 연구자가 과제신청, 평가· 판정위원회 참석, 연구과제(임상시험) 참여 이전에 COI 관리실로부터 충돌관계의 심사를 받아야 하며, 충돌관계가 확인되면 경감·기피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모범행동양식을 만들어 배포하고 교육도 실시 해야 한다. 이러자면 결국 대학에 부서를 신설하고 인력을 채용해야 하는데, 재정 문제가 발목을 잡을 수 밖에 없다. 연구비가 많은 대학에는 COI에 대한 관리 체계의 구축이 더욱 절실하다. 출연(연)에도 필요하다. 정부가 나서야 할 영역이라고 본다.
참고문헌
1. 노환진. 이해충돌의 관리를 위한 가이드라인 작성에 관한 연구. Eumseong: KISTEP; 2021. p. 3.
2. 교육부. 2019 대학 산학협력활동 조사보고서. Seoul: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2021. p.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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